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시기에 요청된 새로운 지식은 구학(舊學)에 대비되어 신학(新學)이라 불렸다. 신학은 주로 서양에서 기원하는 학문이었으며, 그것이 한자문화권에 수용되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였다. 이 번역 작업이 동아시아의 근대를 추동시켰다. 동아시아 각 지역은 번역을 통해 자신의 근대를 만들어갔다. 19세기 말엽 중국과 한국에서 서양 학문의 소개는 대체로 메이지 일본에서 번역된 문헌을 재가공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천연론’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영국에 유학했던 엄복이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직접 번역하였다. 그것도 ‘진화와 윤리’가 간행된 지 2년만에 번역에 착수한 것이었다. 엄복은 ‘천연론’에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뿐만 아니라 사회진화론을 둘러싼 헉슬리와 스펜서의 상반된 논의를 중국에 소개했다. 헉슬리는 만년에 스펜서 류의 낙관적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면서 진화론적 윤리관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엄복의 번역은 19세기 유럽의 지성사에서 배태된 그러한 논의를 동시기의 중국에 전달하였다. ‘천연론’은 사회진화론이 전제하는 경쟁의 주체로서의 개인 혹은 경쟁을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자유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주의 내부의 논쟁을 소개함으로써 전통 중국인의 사유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개인과 자유에 관한 논의가 심화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엄복은 헉슬리의 책을 번역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서양 지식을 동원하여 해설을 시도하는 한편 때로는 자신의 관점에서 헉슬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헉슬리는 진화의 이론 가운데 유전학설을 설명하면서 인도의 브라만교나 불교를 언급하였는데, 엄복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 등 중국의 전통 사상을 동원하여 서양의 학문을 번역하고 설명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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