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북면 |
---|---|
구분 | 지명유래 |
내용 | 川 北 面 (천북면) 천북면(川北面)은 1)마한시대(馬韓時代)는 감계비미국에 속했으며 2)백제시대는 결기현(結己縣)에 속했고 3)신라시대(新羅時代)는 결성군(結城郡) 4)통일신라(統一新羅)때는 결성군(結城郡), 경덕왕때 5)고려(高麗)때 현종 9년(1018)에 흥양현(興陽縣)이라 해서 운주(運州 現 洪城)에 속했음. 6)고려 명종(明宗) 2년(1172)때 결성현에 속함 7)영조(英祖) 9년(1173)에 보령군(保寧郡)속함 8)영조 12년(1736)에 홍성군에 귀속했음 홍성읍지(3) 한말사본에는 용천면지명도(龍川面地名圖)<면계이계(面界里界)는 없음>가 나와있고 이명에 대한 기록이 없음 홍성읍지(洪城邑誌)(4) 한말사본에도 용천면내 31개리가 기록되 있는바 7개리는 폐하고 15개리는 신설(新設)하여 39개리로 되어 있음. 9)고종 광무5년(1901) 5월 오천군에 편입되어 오천군의 북쪽에 있는 면이라 해서 천북면이라 하였고 관할하는 동리는 61개 마을이었음. 10)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결성군(結城郡) 가산면(加山面)의 6개리를 병합하여 다시 천북면이라 호칭 보령군에 편입됨 11)`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이 되었다. ※이 고장은 조선선조(朝鮮宣祖)때에 선조의 생가 아우인 하원군(河原君)이 자리하면서 목말(牧馬)을 많이 길렀으므로 그 후 목축지대로 번성해 왔다. * 천북면의 행정구역 개황 본래(本來)는 홍성군(洪城郡) 용천면(龍川面)의 지역인데 현재 소행정 구역은 8개리로 편성되어 있다. 1)하만리 ... 하궁(河宮)과 두만(斗滿)에서 하(河)와 만(滿)을 따 하만리(河滿里)라 했다. 2)신죽리 ... 「新村(신촌)」과 죽현의 머리글자를 따서 신죽리(新竹里)라 했다. 3)신덕리 ... 상신(上新)과 덕두(德頭)에서 신(新)과 덕(德)을 따 신덕리(新德里)라 했다. 4)낙동리 ... 낙서(洛西)와 동막(東幕)의 머리글자를 따서 낙동리(洛東里)라 했다. 5)궁포리 ... 천궁(川宮)과 삽포(揷浦)의 아래글자를 따서 궁포리라 했다. 6)장은리 ... 장곶과 은포의 머리글자를 따서 장은리라 했다. 7)사호리 ... 사정과 열호(烈湖)의 글자를 하나씩 따 사호리(沙湖里)라 했다. 8)학성리 ... 오학(五鶴)과 연성의 아래 글자를 따서 학성리(鶴城里)라 했다. 지상 자원으로써는 농업 및 특수자원의 생산이 많고 축산업의 요지로 각광을 받으며 해상 자원으로써는 삼면이 바다라 굴, 해태, 양식등 수산물이 풍부하다. 河滿里(하만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 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궁리, 종평동, 주항동, 동산동, 각음동, 두만동, 대천1동, 화곡동 일부를 병합하여 하궁과 두만의 이름을 따서 하만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하만리로 되었다. 고 망 골(하만리<동음의 남쪽마을>)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을 가리켜서 한말이다. 이 동명(洞名)은 고마(古馬, 高馬)와 두만(斗滿)의 뜻이 혼힙(混入), 오용(互用)되고 있다. 두만(斗滿)은 글자 뜻 그대로 매년 풍년이 들어 추수된 곡식이 말에 가득 넘는다 해서 두만이라 했다. 한편, 고만이란 말 역시 가을 타작 마당에서 곡식을 말로될 때 전년보다도 고봉이- 넘게 농사가 풍작이란데서 온 말이다. 여기에서 고마(古馬)와 두만(斗滿)의 옛 상태를 추정(推定)해 보기로 한다. 오래된 옛 지명은 고마(古馬), 금마(金馬), 짐마(藎馬)등의 한자음(漢字音)을 음차기록(音借記錄)해왔다. 백제의 도성(都城)을 고마(固麻)라 기록함도 이에 관련된다. 여기에서 맨처음으로 불리운 동명이 고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고마(古馬)의 마(馬)는 옛 기록에 남쪽(南)을 가리키는 어휘로 쓰여왔다. 그 한 예가 마(馬)파람을 남풍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고망골은 동음의 남쪽마을이란 뜻이된다. 고망골은 조선중기 이후 두만동이라고 불려왔다. 두만(斗滿)은 한국 지명에서 두리계(系)에 속하는 바 주위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두리(周)의 뜻이 된다. 만(滿)자를 사적(史的)으로 더듬어 보면 조선중기에는 「많-」으로 대응되다가 그 이후로는「가득」이란 개념으로 쓰여왔다. 직역하면 추수 마당에서 벼나락이 말(斗)섬에 가득가득 넘었다는 데서 말두자를 첨가한 것이다. 언덕·산·물로 둘러 싸인 이고장은 언제나 풍작(豊作)을 이루고 있따는 지명으로 쓰여온 것이다. 그 후 두리계의 두만동이란 한자 지명은 쇠퇴하고 동음(冬音)이란 지대(地帶)에 대응되는 고만골이 더욱 강하게 언중(言衆)의 의식에 깊이 파고 들고 있다. 그리하여 천북의 남쪽 즉 동음(冬音)의 남쪽 마을이란 뜻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구 새 골(舊새골) 절굴에서 사기점 가는 사이에 있는 동네를「구새골」이라 한다. 사기점들이 번성하기 이전에 있던 동네다. 이 골에는 오래된 큰 무덤이 있고 지금은 세 가구밖에 없다. 지역이 협소한 산골짜기 사이에 있는 골이다. 구새골이라는「구」(舊)는 옛날에 오래된 마을이라는 접두사가 붙어서 된 말인데「구+사+이+골」,「구+새+골」「구새골」이 되었다. 담 안 종평(宗坪) 서(西)쪽으로 옆에 자리한 마을을 담안이라고 부른다. 옛날엔 큰 담이 두른 그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해서 담안이라고 부른다. 동 산 (東山) 하궁(河宮) 西北(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동산(東山), 동산동(東山洞)이라고 부른다. 동산은 분지로 된 동네인데 중앙에 원형으로 도드름하게 입수(入首)한 산을 가리킨다. 동산마을 주위에는 하천이 둥글게 흐르고 있음이 특징이다. 동 음 (冬音) 동음(冬音)(하만리의 대궁과 고망골의 남쪽마을) 漢字音(한자음)과 漢字語(한자어)가 풍기는 뉴앙스가 異色的(이색적)이다. 우선"冬音(동음)"이란 音價(음가)를 알기 위하여 古文獻(고문헌)에서 考證(고증)하는 한편, 冬音(동음)(드름,드름)이라는 意味(의미)를 캐기 위하여 地勢(지세) 形相(형상)을 따라 究明(구명)하기로 한다. 地名別(지명별) 三國史記卷(삼국사기권)37 三國史記卷(삼국사기권)35 신라개정명 麗初名(여초명)) 冬 比 忽(동비홀) 冬 比 忽(동비홀) 開城郡(개성군) 開城府(개성부) 동음나현휴음 冬音奈縣(동음나현) 江陰縣(강음현) 河陰縣(하음현) 冬音奈鼓監城(동음나고감성) 冬 忽(동홀) 海구郡(해구군) 鹽 州(염주) 地勢(지세)로 본 두룸(鶴)형 冬音(동음)>두름>학(鶴)이라고 단정하는데는 두가지 理由(이유)가 있다. 하나는 冬音(동음)고개, 남동쪽을 안두름개, 바깥두름개로 호칭하고 있으며 한자 지명은 鶴浦(학포)로 표기하고 있다. 또하나는 두름개>학포라 지칭하는데는 生命的(생명적)인 의미부여 작용으로써 그 지세가 학(鶴)에 可合(가합)하기 때문이다. 동음(두름)이라는 말이 두루미(鶴)와 有綠(유녹)하기 때문에 代想作用(대상작용)으로 類義造化(유의조화)시킬 수 있다. 形相(형상)을 이루고 있는 地勢(지세)가 흡사 老鶴守魚形(노학수어형)으로 되어 있다. 재언하면 늙은 두루미가 고기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地形關係(지형관계)로 漁物(어물)이 잘 잡히고 농사도 잘되는 곳이다. 두룸섬의 物證(물증)(冬音(동음)에서 마주보임) 들고나는 海水(해수)를 吐(토)하고 마시듯 호수의 干滿(간만)을 살펴보는 두룸섬(鶴島(학포))이 있어 鶴浦(학포)(內外鶴浦(내외학포))와 더불어 이를 實(실)히 잘 立證(입증)하고 있다. 두름개 동네는 이지방에서도 부자마을로 이름나 있다. 두 룸 섬 (鶴島) 두름개 앞으로 섬이 있는데 이섬을 두룸섬(鶴島)이라고 부른다. 두름개 앞에 섬이 자리해 있다 해서 개가 두른 곳에 자리한 섬인데 특히 그 모양이 두루미같다 해서 두룸성이라 한다. 뒷 들 (後野) (동산) 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뒷들이라고 부른다. 마을 뒤로 들을 건너서 마을이 자리해 있다해서 뒷들이라고 부른다. 마 루 들(宗坪>廳坪) 하만리 하궁(河宮)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천북의 진산낙맥(鎭山落脈)이 끝나는 곳 좌우로 흐르는 물이 합쳐져 들을 만들고 있다. 이 양수(兩水)가 모여 하만리 중앙(中央)을 흐르며 천북에서는 제일 큰 내가 된다. 두내가 합해지는 곳은 합금(合襟)이라 해서 수리(水利)가 퍽 좋은 곳이다. 그래서 천북의 면소재지가 이곳에 옮겨진 소이(所以)가 된다. (原來(원래)의 面所在地(면소재지)는 洛東里(낙동리)의 唐峴(당현)에 있었음). 이곳에 면소재지가 서게 됨으로 "마을"을 "마루들"이라 했다. "마루들"의 어의를 아래와 같이 구명한다. 長旨里(장지리)(京畿(경기) 廣州(광주)) 긴마루 禾旨洞(화지동)(全南(전남) 順天(순천)) 숫마루 旨老洞(지노동)(江原(강원) 蔚珍(울진)) 마로골 옛말의 모습을 더듬어 보면「ㅁ,ㄹ」는 宗(종), 樓(누), 脊梁(척량)의 훈(訓)이 되고 「마로,마루」는 청(廳)의 훈(訓)이다. 마루들을 이 곳에서는 종평(宗坪)이라고 한자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근들이란 의미는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청(廳)이 서 있던 들이라는 지명(地名) 생성의 원초성(源初性)이 강하다. 종(宗)의 뜻이 강하면 마라>매래의 발음이 있을 터인데 마루로 하고 있어 관청의 청(廳)을 가리키는 어흔(語痕)이 언중(言衆)사이에서 더느껴진다. 마루들은 종(宗)의 뜻, 청(廳)의 뜻중에서 온 말이다. 방 죽 골 河宮(하궁) 東(동)쪽으로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방죽골」이라고 부른다. 골짜기 근처에 방죽이 있다해서「방죽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다. 샛 뜸 (新垈) 「양편」북쪽으로 새로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샛뜸」이라고 부른다.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新)의 글자와「뜸」(한동네 안에서 따로 몇 집이 떨어져 있는 구역)의 의미를 합하여 「새뜸」이라 했다. 새로난 小마을을 새뜸 그리고 새와 뜸의 사이에 간음현상「ㅅ」이 생겨「샛뜸」으로 발음된다. 세 집 매 (세집내<三家川>) 하만리 동산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학성리 사호리를 경계(境界)하며 들어오는 조수물의 수량이 많았던 곳이다. 지금부터 40년전에는 중선(中船)까지도 들어왔다. 이 곳은 배가 닿기에 알맞는 자연의 석대(石臺)가 있어 최소한 토구와 같았다. 젓배나 생선배가 들어오면 근처 사람이 사러 갔었다. 그 당시에는 집 가호(家戶)가 세집밖에 없었다 해서 세집매라 했다. 지금은 간사지로 막혀서 조수가 못들어 오는 아주 작은 내에 불과하지만 가호수는 많이 늘었다. 양 편 (陽便·陽地뜸) 동음 서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양편이라고 부른다. 일명 양지뜸이라고도 한다. 「양편」은「양지편」즉 양지쪽이란 말이 되고 「양지뜸」음 양지가 되는 조그마한 동네라는 뜻이 된다. 한 동네 안에서 따로따로 몇집씩이 한데 모여있는 구역을 가리키는 극소(極少)집단이다. 원 두 골 (圓頭골) 동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산의 모양이 둥근머리형을 하고 있어 이곳에서오학동 산줄기(서북쪽)가 생기고 또한 가지는 오룡동 산줄기(서남쪽)가 갈라진다. 원두의 모양을 한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원두골이라 한다. 뒷산은 흑운모편마암(黑雲母片麻岩)의 석영맥(石英脈)이 있는 만리금광(滿里金鑛)으로 이름났던 곳이다. 작 골 (鵑골) 양편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양쪽 숲이 우거진 곳에 까치들이 많이 깃들여 살았던 골이다. 동네뒤에 작골고개가 있는데 이곳은 뒤뜰에서 절골로 넘어가는 작은 소리길이 뚫린 골이다. 하 궁 (河宮) 하궁(河宮)의 유래는 한국지명총람④ 충남편 상권 p424에「하궁(河宮)(하궁동) 하만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조선 제19대 선조(宣祖)의 생가 아우 하원군(河原君)의 궁이 있었다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지방에서는 그러한 내력을 그 이상 구체적으로 캐 낼수도 없다. 혹은 옹주(翁主)가 살았었다고도 한다. 천북에 사궁(四宮)이 있는데 궁마다 각기 연기적인 사실들이 혹은 전해지고 혹은 아주 연결되었다. 하궁의 큰 궁집이 담안에 있었다 하는데 큰 주춧돌이 밭에 묻혀있을 뿐이다. 조선말기에 심정승의 증손이 여기에서 거쳐했고 그 뒤로는 마름집이었따가 큰 궁집을 관리할 도리가 없으니 자연 퇴락되어 지금은 큰 담의 윤곽도 찾아 볼수 없다. 「담안」이라는 자연부락의 지명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 울안의 성과 같이 넓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담은 그 근방에 석재(石材)가 드물었으니 석담이 아니고 벽돌담같이 쌓았던 것으로 유추된다. 지형을 고려하여 천북면의 요지산록에 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느 무 재 천북국민학교 西向(서향)에 있는 고래를 느무재라고 한다. 느무재의 語源(어원)은 능묘재이다. 능묘가 있는 고개란 뜻이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는 동안 語源(어원)과 뜻을 忘却(망각)한채 言語(온오)의 본질개념이 흐르는 세월속에 안개처럼 뿌연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 느무재와 타부(Tab) 예로부터 마을에 통하는 고갯길로 시신이 넘어가는 것을 꺼리고 있다. 여기 느무재 고개는 천북의 제일 큰 관문이다. 그래서 상여가 느무재를 넘는 것을 꺼리어 금하고 있다. 상여나 시신이 넘으면 불길할뿐 아니라 그 집이 망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상여는 느무재 고개를 넘지않고 돌아서 가는 慣習(관습)이있다. 鶴城里(학성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염성리, 중랑리, 오학동, 오룡동, 혜똑동, 호변동, 율도동을 병합하여 오학과 염성의 이름을 따서 학성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학성리로 되었다. 녹 노 름(노고(路鼓)노름) 배미실의 북쪽마을 사호리를 마주보는 학성리의 최북단(最北端)이다. 옛날 배미실에서 지은 배를 해수로(海水路)에 내놓고 진수의 제를 지냈다. 여러배를 내놓고 지은 솜씨를 겨루었던 것이다. 진수식하는 날은 노고(路鼓)라 해서 붉은 칠을 한 사면고(四面鼓)를 틀에 매어달고 노래와 노고(路鼓)놀이로 취흥을 북돋었다 한다. 후일(後日)에 「노고놀음」을 축약해서「녹놀음」으로 음운변화(音韻變化)하다가 노고노름이 녹노름으로 되었다. 「노고」에서「노」의 끝음절「ㄴ」이 줄고「ㄱ」이 노의 동성이 되어 「녹」이 된 것이다. 노고(路鼓)놀이 하던 곳이 녹놀이의 지명이 된 것이다. 목 화 밭 골 「저뜨기」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면화밭골」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목화(木花)밭이 많았다해서「면화밭이」있는 골(동네)이라 부른다. 밤 섬 (염성) 남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 섬을 「밤섬」이라고 부른다. 율도라고도 부르는데 갯둑을 쌓아서 육지와 연해 있는 섬이다. 밤처럼 생겼다 해서「밤섬」이라고 부른다. 섬에 마을이 있는데「율도」,「밤섬」이라고 부르고「율도동」이라고 부를때도 있다. 배 미 실 (학성리의 최서북) 배미실 새낭굴의 북쪽 학성리의 북서단(北西端) 무인촌(無人村)이다. 이 곳은 밀림이 우거지고 배사장의 머리가 되기 때문에 옛날에 배를 짓던 조선소(造船所)였다고 할 수 있다. 배를 지어서 밀어내던 부락이라해서 배밀실 즉 배미실이다. 배(船)밀다(押)의 어간 밀과 부락이라는 실이 모여서 된 부락명으로서 옛날에는 천수만 일대의 배를 지어내던 곳이다. 배미실 골에는 옛날에 조개껍질로 회를 다진 터가 있다. 조개무지와 같이 조개가 굳어서 노두(露頭)화 되어있다. 벌 밭 (原村(원촌)) 중랑골 서쪽 벌판에 있는 마을이다. 「벌」은 남방의 지명에 많이 보이는 들(野)과 동의어(同義語)로 벌판이란 뜻이다. 한자어(漢字語)로는 평원(平原)의 의미가 된다. 평(平)의 훈(訓)이 벌(bal)이고 원(原)의 훈(訓)도 벌(bal)이다. 벌밭하면「벌+밭」의 합성어가 된다. 「벌+밭+마을」의 복합명사가 되면 발음이 선명하지 않으니까 마을이 생략된 채 벌밭으로 통용된다. 벌(原) 밭(田)은 옛날말로 두던밭이라 했다. 원(原)의 중기어(中期語)가 두던(훈몽자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말로는 벌판의 밭에 있는 마을이 되는 셈이다. 벌의 밭이 그대로 동명이 되었다. 손바래기 (客望골) 고만굴에서 나루터 가는 고개마을을 가리킨다. 옛날의 교통은 해운였던 관계로 오천나루터 가는 통로로 되었던 곳이다. 오천 수영(水營)과 가까운 곳이라 유일한 통로였다. (철도가 생기고 자동차길이 나기 전까지) 이곳이 천북으로 들어오는 관문인지라 손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손님을 바래다 주는 끝이라 해서 「손님의 바래지 고개」가 줄어서 「손바래기」가 되었다. 염 성 (鹽城) 「벌밭」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염성」,「염성리」라고 부른다. 염밭이 있어서 소금을 성(城)처럼 쌓은 마을이라「염성」,「염성리」라 부른다. 오 룡 동 오룡동(五龍洞)이라 부르게 된 地緣지은 이 동리 뒷산의 모습이 흡사 다섯용이 꿈틀거리며 내려오는 형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수(風水)에서는 이를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한다. 즉 다섯동이 여의주(如意珠)를 서로가 먼저 물기 위해 다투는 형이다. 용은 원래 신성시(神聖視)되고 있는 상상적 동물이라 산세가 수려하고 지룡(枝龍)의 다섯가지가 생기있어 보이며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핵을 쫓아 모이게 되는 모습을 오룡쟁주형이라 한다. 이러한 산간촌은 산수(山水)가 좋기 때문에(오늘날 자연 환경이 좋기 때문에) 명당촌(明堂村)으로 이름이 나있다. 오 천(鰲川)나 루 터 「고만골」남쪽으로 나룻터가 있는데 이 나룻터를 오천(鰲川)나룻터라고 부른다. 작은배로 건너 다니는 나룻터로서 오천과 천북을 잇는 나루터다. 오 학 동(五鶴洞) 「중랑골」(中郞里(중랑리)) 서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오학동(五鶴洞)이라한다. 이 지형은 산세가 수려하여 자연환경이 좋아 옛날에 절이 있던 골이다. 산세를 비유하면 오학가련형(五鶴駕輦形)이다. 오학이 날아와 있는 모습같다 해서 오학동이라 부른다. 외 염 이(外鹽이) 염성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오학동에서 나래를 편 양쪽의 산맥에 둘러쌓인 울 안의 염성과 외염이 있다. 염성은 염밭으로 흥하여 동네가 먼저 생겼고, 다음으로 생긴 부락이 외염이다. 외염이란 염성이의밖에 있다해서 외염이의 지명화로 「외염이」가 됐다. 저 뜨 기 五龍洞(오룡동) 남(南)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저뜨기)라고 부른다. 오천수영당시 이곳이 젓의 집산지였다. 소매상들이 새우젓, 어리굴젓등 이곳에서 떼다가 장사해 왔기 때문에 젓을 떼는 곳이라 해서 젓떠기가 쩟뜨기로 되었다. 중 랑 골 (中郞골) 오학동의 동북쪽에 있는데 학성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다. 오학동을 중간(中間)에 두고 동쪽의 구봉산 하에 있는 마을이 중랑골이다. 구봉산이 기두가 되어 산맥이 수려하고 서쪽으로 장막(帳幕)을 펴 놓은 형체가 오학인가형(五鶴引駕形)이다. 이끄는 수레에 탄 준수한 신랑이 처음 내린 곳이 땅골이다. 중천에서 내려 중천(中天)에서 내려 온 신랑을 환영하는 그 자리가 땅골 북쪽의 북곡(鼓谷)이다. 북곡(鼓谷)은 영고형(迎鼓形)으로 북을 치며 맞이 한다는 뜻이 된다. 다음으로 만인이 선망하는 가운데 자리에 앉힌 신랑이 있다. 누구라 말할수 없어 신랑이 자리한 중앙이라 해서 중랑골이라 한다. 학이 이끄는 수레에서 내린 신랑이 자리한 곳은 부귀연면(富貴連綿)하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이곳을 상촌이라 했다. 상촌의 격을 유지하기 위하여 광활한 수구(水口)의 폐 즉 힘을 더노라 오학동 동쪽에 소나무를 인작으로 심어 놓았다. 중랑골에는 두가지 지하맥의 흐름이 특징이다. 묘날을 중심으로 서쪽은 해수맥이 흐르고 묘날 동쪽은 식수맥이 흐르고 있음이 특징이다. 호 동 (胡洞) 위치 .... 학성리 저뜨기 남쪽에 있는 마을 이 곳을 오랑캐골 또는 호동(胡洞)이라 부르기는 오래전 부터이다. 옛날 용천면(천북땅의 옛면명)일대에 서구인(西區人)선박이 들어온 것은 정조중엽 1791~1795때이고 1832년에는 영국상선이 무역 목적으로 고대도까지 왔었다. 여기서 오랑캐골이라 함은 서구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중국인, 왜인들이 드나들기는 매우 오랜 옛날부터다. 전설에 의하여 임란후 중국배가 오천앞 근방에서 조난을 당하여 본국에 못가게 되메 이 호동에서 자리를 잡고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후 중국배들이 들어오면 호동에서 묵었다고하며 회변앞 모래사장에서 중국놈들까지 울렸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파선당한 중국인들이 오래 살던 부락인데 지금은 중국인이 살고있지 않고 다만 전설 유래이다. 회 변 「저뜨기」남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회변」또는 호변동(湖邊洞)이라고 부른다. 천수만(淺水滿)바다물이 광천(廣川)으로 들어오는 바닷가에 자리한 마을인데 호수(湖水)의 가에 자리한 듯 놓여있는 마을이다. 백사장(白沙場)모래도 고으며 호반의 마을같이 생겼다해서 호변동(湖邊洞), 「회변」이라고 부른다. 한 산 사 (寒山寺) 동음(冬音) 동남쪽으로 절이 있는데 이 절이 한산사(寒山寺)라 부르는 절이다. 오천(鰲川)과 강을 사이에 하고 건너쪽에 자리한 절인데 조선(朝鮮)때 수군영(水軍營)이 였던 오천(鰲川)에서 큰 빛을 본 절이다. 오천(鰲川)팔경(八景)의 하나로 꼽는데 종(鍾)소리가 으뜸이었다. 沙湖里(사호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정동, 상판동, 하판동, 열호동, 명포동, 통포동, 사기점동, 봉상동, 하선동을 병합하여 사정과 열호의 이름을 따서 사호동이라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로 되었다. 여기에는 수령 400년가량의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에서 보호하고 있다. 늘 문 이 (板門) 통개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해안선으로 뻗은 양 산록(山麓)사이로 긴 골이 있는데 소촌(뜸)이 산재되어있다. 바다에서 동네로 통하는 어구가 매우 좁기 때문에 옛날에 널빤지 를 걸어놓고 다녔다는 흔적이 있어 이곳을 널문이라 한다. 널은(板) 판대기로 문은 동네의 입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널(板)과 문(門)의 합성어이다. 널문을 명사화시키는 어말첨가(語末添加)음이 붙어 널문이가 되었다. 봉 화 대 봉화는 난리를 알리는 신호로서 신라때부터 있었으나 조선때에는 봉화축을 전국에 600여군데나 두었었다. 서해안의 봉수통로를 살펴보면 전라도에서 올라와 서천의 은은산에서 비인의 칠지산 남포의 통달산 여도청에서 서쪽으로 보령 조침산, 홍성의 홍양곡 결성의 성산, 서산의 토비산, 태안의 백화산에서 동으로 서산의 북산 다시 동으로 해미의 안국산에서 크게 합하여 북으로 올라갔다. 원산도의 봉화재에서 천북의 붕화재로 연결되는 선은 서해안의 지선으로 북쪽의 경성성산 봉수에 연락하게 되었었다. 봉화재는 옛날 봉화대의 수배 대전의 거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고려기가 이곳 저곳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장은 일부의 높은 산기슭을 연래골이라 하는바 여기에서 봉화수의 대원들이 훈련한 곳이라는 전설도 있다. 사 기 점 (사기점골~沙器店谷) 절굴에서 통개가는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이 곳에서 사기를 구웠는데 천북에서는 제일 큰 요업지이다. 지금도 이 마을의 동쪽과 서쪽에 큰 요업터가 있다. 제품이 된 사기는 배에다 싣고 여러곳에 다니며 팔았다는 전설이 있다. 근방에 사기를 구운 자리가 네 곳이나 있지만 사기의 질이 좋지않아 중간에 폐허(廢虛)가 되고 이곳만 번성해 오다가 새로운 사기 그릇이 나온 후부터 중단되었다. 요업터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선 학 골 「통개」東南(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을「선학골」이라 부른다. 「선학동」「서낙굴」이라고도 부르는 마을로서 지형(地形)이 신선이 학(鶴)을 타고 노는 형국이라 하여 「선학골」「仙鶴洞(선학동)」「서낙굴」이라 부른다. 열 문 이 (烈湖·開門) 집개의 북쪽 천수만에 면한 마을이다. 마을앞에 바다가 환히 열려있어 문이 열려있는 마을이다. 북쪽의 널문이는 좁은 문인데 이곳은 바다와 접한 넓은 문인 널문(開門)의 동네이다. 400여년 묵은 느티나무가 천연의 기념물처럼 서있고 천수만의 앞바다가 호수같이 둘러쌓여 있어 좋은 경관(景觀)을 이루고 있다. 절 골 「봉화산」동남쪽으로 자리한 마을을「절골」이라고 부른다. 절이있던 마을이라「절골」이라 부른다. 남쪽에 �Y대봉이 있다. 천북에서는 제일 컷던 절로서 조선중엽에 자연폐찰이 되었다. 통 개 「절골」서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통개」라고 부른다. 「통보」「통포리」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지형(地形)이 통처럼 생긴 갯가의 마을이라 「통개」「통포」「통포리」라고 부른다. 長隱里(장은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은포동, 수철리, 장곶리, 매향동, 봉하동, 밀포동, 아포리, 어망동, 종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장곶과 은포의 이름을 따서 장은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로 되었다. 동 위 점 진구지 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동위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동이를 만드는 그릇집이 있는 마을이였다해서 「동위점」또는「종지동」이라고 부른다. 동 이 점 (磨 店) <장은국민학교 북쪽 산고개넘어 있음> 천북면에 동이점, 사기점, 무쇠점, 점말등이 있는데 토기의 산지로 알려진 곳이다. 동이점에 가면 동리의 서쪽에서는 백자기를 많이 구었다. 지금도 자기(磁器)를 구었던 가마터가 있고 산정(山頂)에는 백토가 많이 나고 있다.(인근 결성 성호의 백토광만 못하다) 동이점의 동쪽에는 옹기(甕器)를 많이 구었다. 이 마을의 논뱀이 지중에는 질이 좋은 점토가 많이 나고있다.(인근 결성 성호의 백토광만 못하다). 동이점의 동쪽에는 옹기를 많이 구었다. 이 마을의 논뱀이 지층에는 질이 좋은 점토가 많이 나고있어 인근 옹기점에서 이를 실어다가 그릇을 구어냈다 한다. 동이점에서는 해방뒤까지도 옹기를 구어낸 곳이다. 두루봉의 유래 위치 : 천북면 장은리 1구 제일 높은 산 연유 : 높은산 봉우리에 겨우 두루미 한 마리가 앉을 정도로 사면이 바다였다는 데서옴. 전설 : 지구개벽과 관련되는 전설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에는 오랜세월 동안에 수많은 개벽과 무수한 지각변동을 해왔다. 본군의 미산면만해도 그 일대가 수천만년전에 바다에서 솟아오른 땅이다. 여기 서해안은 수억년전에 융기했다가 지금은 침강하는 해안이다. 그리고 보면 여기 천북면의 제일높은 산은 바다에서 솟아올라 왔다는 설화적 근거가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높은 에베레스트산이 바다에서 솟아 올랐다는 사실에 비추어 두루봉 역시 창조적 개벽의 유혼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옛날 옛적에 두루미 한 마리 앉을 정도로 바닷물이 찰랑이던 지금은 저만치 높은 산이 되었으니 수억년을 하루로 하면 우리 일생에도 지구개벽을 여러번 볼수 있다. 꿈 이야기 같은 전설이다. 만 석 곡 (萬石谷) 위치 : 천북면 장은리 1구 만석곡 높은 골짜구니에 옛날의 절터가 있다. 그곳에는 큰샘이 있어 대량의 물이 나올뿐만 아니라 유달리 차고 맑아 피부병이 잘나을 정도이다. 1979년 이곳에 수도탱크를 붇고 수㎞가 되는 장은국민학교까지 수도를 연결하여 수백명이 물을 마시고 있다. 이곳에 옛날부터 만석군이 난다는 전설이 있는데 아마도 만인에게 물을 대주는 만석군이의 즉 물명탕을 가리키는 전설로 해석되고 있다. 매 향 리 (梅香里>맹이) 하만리에서 장은리 고개를 넘는 초입구의 마을이다. 봉화산 난맥이 여러 줄기로 내려오다가 동향하여 맺힌 봉우리가 있다. 입수(入首)된 이 봉우리를 중심하여 여러 지맥(枝脈)이 감싸고 있다. 이 형상이 마치 매화꽃이 떨어져 있는 형체이다. 풍수설에는 이를 매화낙지(梅花落地)라 하여 이곳을 매화향기 그윽한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화향기 그윽한 곳이라하여 매향리(梅香里)부락이라 한다. 매화향기가 매향으로 매향이 축음되어 맹이로 되어 이 마을을 맹이라 한다. 무 쇠 점 (수철리 : 水鐵里) 진구지 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무쇠점」또는「수철리」라고 부른다. 무쇠는 물쇠(水鐵)로서 물+쇠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물쇠에 다시「점」이 加해져서 물+쇠+점>물쇠+점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 소철(素鐵)이다. 염기성岩이 갈철광(褐鐵鑛)으로 잔류하였다가 풍화작용(風化作用)으로 유수와 함께 흘러 냇가에 산재되어 있다. 점(店)이란 점포를 말하지만 地名(지명)에서는 흔히 특산물이 많을 때 店이라 붙인다. 이웃에 있는 옛전설을 아래와 같이 적어본다. 장은국민학교 서북쪽의 산꼭대기에 장수구덩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때 이 고을에 장수가 날 것을 꺼린 왜병들이 이 산정에 크게 구덩이를 파고 쇳물을 끓여 부어서 혈을 끊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곳에는 큰 구덩이가 남아있고 그 사방둘레의 돌들이 붉게 탄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쇠뭉치 탄 것이있어 비가오면 흘러내려 사방에 산재되어 있다. 또한 이곳 냇가에 쌓여있는 모래에는 쇳가루가 많이 섞여있다. 이곳을 무쇠점이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 유래되었다. 밀 파 실 밀파실(長陰里) 西쪽 진구지(長串, 장곶) 서쪽에 있음. 이조말기의 동명 한자음 표기로는 밀포동(密浦洞)이지만 原谷名(원곡명)은 밀파실이다. 밀파실은 옛표기로는 密波兮(밀파혜) 또는 密波衣(밀파의)로 되어있다.밀파실에서 오는 어감(語感)이 매우 옛스럽고 함축(含蓄)된 有緣性(유연성)을 더듬어 볼 수 있기로 옛 문헌을 통하여 고증(考證)하기로 한다. 地名例(지명예)(아래 세가지例(예)로 줄임) 文峴縣(문현현) - 云(운) 斤戶波兮(근호파혜) 삼국사기 권37 三峴縣(삼현현) - 云(운) 밀파의 삼국사기 권37 引巖縣(인암현) - 運(운) 濟次衣(재차의) 삼국사기 권35 진 구 지 진구지(長串(장곶), 長岬(장갑) 긴곶 긴고지>진고지>진구지) 一) 위치 : 長隱里(장은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무쇠점(水鐵里)의 남쪽으로 길게 散在(산재)한 聚落(취락) 部落(부락)이다. 二) 形成(형성) : 海岸近處(해안근처)의 陸地(육지)가 海水面(해수면) 아래로 침강되면 出入(출입)이 복잡한 리아스식 海岸(해안)을 만든다. 侵蝕(칠식)된 山地(산지)에 바다가 陸地(육지) 깊숙히 들어와 海岸線(해안선)의 出入(출입)이 복잡한 곶(岬)을 만든다. 三) 지형 : 屈曲(굴곡)을 이루고 있는 陵線(능선)이 海岸(해안)으로 向(향)하여 길게 뻗어나온 산줄기가 이곳의 특징이다. 이 地形(지형)에 알맞는 이름을 長隱(장은)이라는 長字장자)로 表現(표현)한 것이다. 四) 意味(의미)「진구지」는 길게 뻗은 「곶」이란 뜻 漢字(한자)로 長串(장곶) 또는 長岬(장갑)이다. 五) 音考(음고) 原義(원의)「긴 곶」에 대하여 音韻變化(음운변화)를 살펴본다. 「곶」의 뜻 : 地名(지명)아래에 붙어서 반도형(半島形)으로 된 岬(갑)을 이름하는 말 串(곶)의 地名化(지명화)「진구지」는「긴곶」에서 온 地名(지명)이다.(長串(장곶)) 「긴곶」의 地名調化(지명조화)로 "긴고지"가 되고 진구지로 변했다. 串(곶)에 部落(부락)이 서고 言衆(언중)이 오래동안 불려왔으므로 地名化(지명화)되었다. 백 목 전 (장은3구 서북끝부리) 150년전 장은3구에 사는 가난한 어부가 고기를 잡기위하여 그물살을 맺는데 하루는 청어가 하도많이 들어서 너무좋아 어찌할 바를 몰라 흰광목을 깔고 청어를 넣고 쌓고 했다는 것이다. 흰광목위에다 천을 벌렸다해서 흰광목천인데 흰은 한자에서 백으로 변하여 백광목전 하다가 발음축약에 의하여 "광"을 탈락시키여 "백목의전"이란 뜻으로 백목전이라 한 것이다. 천수만일에 대해서는 서부면의 어사라와 천북면 장은리 특히 백목전에서 청어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난 이름이다. 숨 은 개 위치 : 천북면 장은리 3구(진구시 서북쪽에 있는 마을) 숨은개의 유래 : 이 역시 은구형에서 온 부락이름이다. 장은리 진구지에 들어가면 총때뿌리라는 지명이 있는데 마치 총대를 꼬누고 있는 것 같은 지형이 있다. 이총대 뿌리는 맞은편의 큰 호랑이를 향하여 포수가 겨누고 있는 격으로 되어있다. 큰개가 있는 것을 보고 기세좋게 달려온 호랑이인데 이 호랑이에게 정면으로 총뿌리를 겨누니 호랑이는 기운을 잃고 기세양난이다. 약한 개를 놓고 약육강식의 상전상극전이 벌어진 셈이다. 총대뿌리에 제동이 걸린 호랑이는 마치 함정에 빠진 격이되니 개는 숨어 있으되 생기가 있는지라 은구형(隱拘形)의 명당에서는 부귀를 누리는 발복이 연면하였다. 아 포 (牙浦) 밀파실 서쪽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아포동(牙浦洞)이라 한다. 해변에 연한 산줄기가 마치 상어의 어금니와 같기 때문에 이곳을 흐르는 개(浦)를 아포(牙浦)라고 한다. 옛 지명으로 아지포(牙之浦)라고 했다. 어사리 : 어망동(漁綱洞) 1900년 무렵 이곳에서는 청어가 많이 잡혔다. 앞바다 천수만에 청어때가 모여 들어 청어잡이 어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어망동이니 어사리니 아토니 하는 곳에는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하였다. 이곳이 어망동이라고 명명된 소이는 지형과 생업의 함수관계가 여합부절하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물형을 스켓치 한다면 늙은 어부가 그물을 치고있는 형국에 아주흡사하다. 이를 한자어로 표현하면 노옹설망형(老翁說網形)이라 고기잡이에 익숙한 노인이 물때를 맞추어 그물을 말끔하게 쳐놓은 형상이니 고기가 안들리없고 안잡힐리 없다. 그리하여 지명이 고기그물이란 뜻으로 어망이라 했고 여기에 사람이 모여사는 곳을 붙여 어망동이라 했다. 弓浦里(궁포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1901)년에 오천군의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삽포동, 오만동, 천궁리, 금파동, 온천동, 종지동 일부를 병합하여 천궁과 삽포의 이름을 따서 궁포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궁포리로 되었다. 금 파 동 (金波洞) 천궁(川弓)남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 結城(결성)에 사는 한 선비가 결성(結城)땅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파도에 어리는 건너의 황금빛이 마치 물위에 금파(金波)를 이르킨다하는 시를 읊었는데 황금빛의 지역이 지금 자리한 금파동(金波洞)이라고 부른다. 삽 개 (揷浦) 「큰오만」이 북서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삽개」라 부르는 마을이다. 결성으로 건너 다니는 나루가 옛날에는 크게 자리했던 마을이다. 「개」(浦)를 인공(人工)으로 키우고 포구를 손집했기 때문에 삽개(揷浦)라 부른다. 성원나룻개 (삽개) 북쪽으로 나루터가 있는데 이 나루터를 (성원나룻개)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나루를 건너면 결성(結城)땅으로 이어진다. 이곳은 결성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쇠 편 「큰 오만이」東南(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이「쇠편」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바닷가였을 때 와우형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마을이다. 오 만 이 (五晩洞) 「五晩(오만)」이 남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큰오만이」라 부르고 오만(五晩)이 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작은오만이」라고 부른다. 「오만이」는「오만동」이라고도 부르는데「중포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원 적 골 (溫泉洞) 궁포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원적골 샘뱀에서 약수가 나왔다해서 이곳을 약수터라고 했다. 병자가 이 샘에 와서 목욕하거나 온수에 물찜하거나하면 병에 잘나았다는 전설이 있는샘이다. 이 샘에는 온천에서 나는 水草(수초)가 돋고 겨울에도 이 샘물이 흐르는 곳에는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눈이 내려도 1/5이밖에 안쌓인다. 눈보라가 내리는 겨울에도 온화하기 때문에 온천동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온천이 있는 곳에는 온천리(溫泉里), 온천동(溫泉洞)이라는 지명이 더러있다. 남서해안에서 온천이 있는 곳은 온양온천, 도고온천, 덕산온천이 있다. 그리고 이남더 후보지는 홍성근방하고 이곳의 온천동이다. 아마도 지하 화산맥이 아산만에서 남주하여 홍성을 거쳐 천북 근방에서 주춤했다가 비인 복종산에서 멈춘 듯 하다고 관심있는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 바다 온천은 16개소인데 온천수가 제일 높은 곳이 부곡78도이고 지표수온(地表水溫)이 높은 곳은 도고27도이다. 이곳 온천동의 수온은 15도 정도이다. 장 승 백 이 장승의 위치 : 궁포리 2구 마을입구 장승의 의의 : deviipost 또는 천하대장군의 이름으로 외국인 사이에 선전되어 있는 민속의 하나이다. 장승의 형태 : 1. 상부에 사람의 면상이 조각되있는데 보통 남녀로 쌍이 되어 마주서있다. 2. 남우는 두상에 관을 조각하며 목신전면에 천하대장군이라 묵서되어 있다. 3. 여우는 관이 없고 전면에 지하대장군이라 묵서되어 있다. 장승건립의 취지 : 이정표와는 달리 순전히 동리의 수호신으로 건립되었다. ※ 종교적 의식은 전혀없었다 한다. 장승의 역할 : 다른 지방에서 돌림병 같은 것이 돌면(지금의 전염병)이 장승앞에 제를 지내어 돌림병을 예방 ※ 주로 액병예방의 수호신 역할 장승의 없어진 시기 : 현대과학 문명과 함께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민속신앙의 쇠잔에 따라 구장승이 삭아 없어지므로 자연 철거된 것이다. 박달나무 궁포리 2區(구)에 수령 400년이나되고 수고7m 둘레3m되는 박달나무가 가파른 산중덕에 자리하고 있어 바다물이 불어 배가 다앗을 때 밧줄을 매든 나무라 한다. 청 궁 (淸宮) (궁포리 청원궁 = 옛날 원궁) 中宗大王(중종대왕)의 二女(이녀)되시는 公主(공주)께서 韓景孫(한경손)께 시집오시게 되어 韓景孫(한경손)께서는 숭덕대부(崇德大夫) 淸原尉(청원위)에 올라 서울에 사시다가 중도에 用川面(용천면) 이곳에 落鄕(낙향)하여 公主任(공주임)과 함께 餘生(여생)을 보내셨다. 中宗大王(중종대왕)의 公主(공주)되시는 분이 사시는 곳이라 하여 淸原尉宅(청원위택)이라고 하다가 后世(후세)에 淸宮(청궁)이라 호칭했다. 이 家宅(가택)을 宮(궁)집이라 함은 건축이 정교하고 웅대하여 크기와 모양이 宮(대궐)과 같았기 때문이다. 公主(공주)님이 사시는 <淸原尉(청원위)가 사는> 宮(궁)집이라 해서 淸原二字(청원이자)와 宮字(궁자)를 合成(합성)하여 淸原宮(청원궁)집 또는 縮約(축약)해서 淸宮(청궁)집 또는 淸宮(청궁)>宮(궁)집이라 칭하여 왔고 현재 건물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考證(고증)한 里名(이명)의 변천 1) 洪城郡誌所載(홍성군지소재(洪州邑誌(홍주읍지)(二) 興地圖書上(홍지도서상) 英祖朝字本(영조조자본) p13) p787에 南用川面(남용천면)에 原宮(원궁)이라 기록되었음(약233年前) 2)洪城郡誌(홍성군지)(四韓末(사한말) 寫本(사본) = p450 p819에는 用川面(용천면) 60中 河原宮里(하원궁리)가 기록되었음. 3) 洪城郡誌(홍성군지)(五韓末(오한말) 寫本(사본) = p52) p826에는 역시 用川面(용천면) 河原宮(하원궁)이라 기록되었음. 4) 1987年(光武元年(광무원년)=丁酉(정유))地方制度(지방제도) 改正(개정)에 따라 洪州(홍주)를 폐지하고 洪城郡(홍성군))으로 改稱(개칭)되면서 鰲川郡(오천군)에 移屬(이속) 同時(동시)에 用川面(용천면)은 자취를 감추고 川北面(천북면)으로 呼稱(호칭)되게 되었다. 移郡關係(이군관계)로 面(면)의 名稱(명칭)도 바뀌고 오랜 地名(지명)이 川弓里(천궁리)로 遁甲(둔갑)한데는 一理(일리)가 있다. 이 地方(지방) 地形(지형)이 마치 큰 활이 휘인 것 같은데 그 사이로 물(개)이 흐르는 모양이 내의활 같다해서 川弓里(천궁리)라 했다. 發音(발음)은 옛의 청궁이나 그 當時(당시)의 川弓(천궁)은 비슷하다. 淸宮里(청궁리)가 歷史(역사)는 오래나 淸宮(청궁)집이 퇴곽되어 起的(기적)인 緣由(연유)가 世人(세인)의 觀心(관심)에서 멀어지고 地形(지형)이 활모양같은 데에 言衆(언중)의 이미지가 점점 부각되면서 川弓(천궁)이 대두된 것으로 본다. <流水(유수)의 모양이 半月形(반월형) 卽(즉) 弓形(궁형)인데 地緣(지연)이 됨> 지금은 1914年 行政區域(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川弓里(천궁리)와 浦(포)의 이름을 따서 弓浦里(궁포리)라 改稱(개칭)하였음. 洛東里(낙동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으로서 낙동이라 하였는데 고종광무5년(1901)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낙서동, 작현동, 구동, 동막동, 당현동, 심박동, 본궁동, 송현동, 빙도동, 화곡동 일부와 결성군 가산면 점촌 일부를 병합 낙동리라하였고,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낙동리로 되었다. 구 동 (九洞) 「당꼬지」북쪽으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九洞(구동)」이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아홉 개의 동골이 있다해서「九洞(구동)」「九洞(구동)」굴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낙 동 (洛洞) 낙서(洛西) 동쪽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낙동」(洛洞)이라고 부른다. 이지대가 능선의 폭이 좁아 목같이 되어 있어 남북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길다. 흐르는 물의 동쪽을 낙동(洛洞)이라고 하는데 유역이 넓고 햇볕을 많이 받아 풍광이 명미한 곳이다. 낙 서 (洛西) 낙동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洛西洞(낙서동)」이라고 부르는데 해가지고 달이 떠오를 때 달빛에 비치는 정경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한다해서 西山(서산)에 기우는 곳에 자리한 「낙서」「낙서리」라 부른다. 날 금 점 「낙서」마을옆에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날금점」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금이 많이 나오던 마을로서 「낙서」마을옆에 자리해 있다해서 「날금점」이라고 부른다. 동 매 기 (동막이>東幕) 당꼬지 동쪽에 자리한 마을을「동매기」라고 부른다. 「동막」「동막리」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마을이 생길 때 동쪽에 山幕(산막)이 처음 자리하면서 마을이 생겼다해서 동막(東幕)리라고도 부른다. 또한 변해서 동매기라고 부른다. 본 궁 (낙동리 본궁부락) 당구지 남서쪽에 있는 마을 전래속요에 의하면 천북에는 사궁팔개(四宮八浦)가 있다. 이름하여 하궁, 천궁, 본궁, 대궁(河宮(하궁), 川宮(천궁), 本宮(본궁), 大宮(대궁)이 있다. 본궁의 지형과 인근의 지명을 종합분석하여 본궁의 소이연을 찾아보면 반궁이라 하면 수긍이 간다. 풍수설에 의하면 본궁을 그 모양이 금으로 만든 소반 즉 금소반(금쟁반)과 비슷하다. 그래서 금반형이 있다하는 곳이다. 원래 큰집터가 들어설 동네이니까 궁자가 해당된다. 소반(쟁반)같은 궁이니까 반궁으로 전해와야 하는데 오랜 세월을 불려 내려오다보니 여러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본궁으로 변한 것이라 유추한다. 몇가지 지명을 금반형에 관련시켜 해석해 보기로 하겠다. 관련된 지명을 예거하면 본궁 남쪽에 빈섬이 있고 빈섬 주위에 노고녀바위 백정도 선유도가 있다. 또한 대안의 동남쪽에 고잔이 있고 그 남쪽에는 오천옆에 상사봉이 있다. 본궁의 동북쪽에 날금점이 있고 그 남쪽으로 동막이가 있다. 금반을 놓고 주위의 지명과의 연계성을 지어보면 다음과 같다. 무태는 남산아래 본궁이 된다. 먼저 본궁의 동쪽에 막을치니 동막이 훌륭하다. 금반의 자료가 되는 금은 어디에서 가져왔느냐 하면 날금점에서 타다만든 셈이다. 금반을 두고 용지무궁한 술은 앞의 바다물이 된다. 잔은 건너편 고잔에 있다. 금반이 있고 술과 안주에 이름난 잔이 있으니 여기에는 무대의 주인공 미인이 등장하여야 마땅하다. 미인섬은 옛날부터 미인이 많이 난다는 전설 그대로 미인이매 틀림없다. 미인도옆에 바위가 있는데 이를 노구>노고(老姑)여 바위라 한다. 늙은 시어미로서 미인의 하역으로 부엌에서 시중을 들다 고기는 백정도에서 무궁무진하게 공급된다. 진수성찬에 취흥이 대단하니 선유도에서 문자그대로 향연의 극락을 장식할 곳이다. 여기에서 칠보단장한 미인이 섬섬옥수로 술을 따르며 영롱한 윤향을 굴리는 소리가 대안에 메아리칠 때 멀리서 쳐다보는 산은 미인을 그리는 심정 그대로가 물화되어 상사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이 반궁의 금반형에 관련된 정경의 대강이다. 빙 섬 (美人島(미인도)>氷島(빙도)) 「本宮(본궁)」남쪽으로 섬이 있는데 이섬을 「빙섬」이라고 부른다. 「빙도」, 美人島(미인도)라고도 부르는데 조선때는 홍주군과 보령군의 이름이었다. 美人(미인)이 많이 나오는 섬이라 해서 「미인도」라고도 부른다. 川北面(천북면)의 유일한 유인도(有人島)로서 오천면을 마주보는 바다가운데 자리하였으며 해안선 연장길이는 ㎞이며 면적은 0.73㎢ 바다위에 빙하(氷河)같이 놓여있다해서 氷島(빙도)라 부른다. 八一五(팔일오)해방 전후만하여도 섬에서 장보러 드나드는 섬의 풍선들이 백여척씩 이 섬옆을 지나가게 되는데 그 정경이야말로 으뜸이어서 (얼음)을 탄 섬으로도 알려졌던 섬이다. 빙섬과 참굴논뱀이 옛날 어느 양반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이 잔치를 준비하느라 여러날 시달리고 배탈이 났던 미인며느리가 여러 손님들 앞에서 참다못해 방귀를 뀌었다 한다. 그래서 이 미인을 빙섬에 귀양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 미인며느리가 살기에 필요한 논마지기를 본궁 뜰앞에 마련해 두었다는 전설로서 그 논이름을 참굴논뱀이라 전하여 진다고 한다. 심 박 골 (深朴골) 탕고지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해변에 가까우면서도 산에 나무와 숲이 우거진 깊은 곳이다. 산이 원형으로 둘러쌓여 동네에 들어가려면 깊은 숲속을 넘어야 된다. 그리고 인심이 순후하여 천연의 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순박골이라고 전해진다 한다. 수 꾸 지 (숯구지, 수꼬지) 위치 : 천북면 낙동리 1구(화곡 서남쪽에 있는 마을) 유래 : 오늘날의 목탄업이라 할 수 있는 외로운 직업의 고닮음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주인공의 애화로 이 동리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천북면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부락으로 텃굴이 있다. 여기에서 얼마 안떨어진 후미진 골에 외딴집이 하나가 있었다. 이 집에서 자식도 없는 내외가 숯��는 직업으로 그날 그날을 근근히 살아왔다. 전답하나 장만못한 노부부가 만년에는 더욱 고생이 심했다. 숯은 구어도 잘팔리지 않고 생활은 고닮으고 자식이 없는 몸이되니 의로운 집에도 생의 환멸이 불꽃처럼 치솟았다. 늦서리가 내리는 소슬한 어느 10월 노부부는 유일의 생계로 삼아오던 숯가게에 마음 껏 불을 지르고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숯을 구었다는 장소도 묘연하고 노부부의 애화도 사라진체 젖소를 키우는 집이 늘고 있다. 작 골 (까치실>鵲谷) 심박골의 뒷동네를 「까치실」이라 한다. 이 근방의 송현이라서 솔이 많이 우거진 고개 모랭이가 있고 남쪽에는 나무숲이 우거진 신박골이 있으니 까치가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까치가 살던 숲이나 골이라해서「까치실」이라 한다. 까치실은 작촌(鵲村)또는 까치내가 되니 작은 골임은 물론이다. 터 굴 (터골) (垈谷, 基谷) 화곡 팔종류의 석기(石器)가 출토된 유적 마을 고(考) 一) 선사(先史)마을 터굴은 천북국민학교에서 동남쪽 1㎞지점에 있는 마을이다. 터굴은 천북면내(川北面內)에서 가장 오래된 부락으로 알려져 있다. 옛 사람들이 농경(農耕)으로 정착하면서 집을 짓고 부락을 형성시켜 왔기 때문에 사적(史的)인 의미가 농후하게 남어 터(基, 垈)가 되는 부락으로 호칭하고 있다. 지형(地形)으로 봐도 취락(聚落)의 지대가 높고 개(浦)가 바로 앞에 있었던 곳으로 옛부락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터(基,垈)의 골이라 이곳에는 옛 무덤이 있고 또한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에서 농경기초엽(農耕期初葉)의 유물이 나오고 있다. 二) 한자지명(漢字地名)의 고찰 이곳의 한자지명은 화곡(禾谷)이다. 화(禾)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면 화(禾)의 고음(古音)이나 고훈(古訓)이 「수」였다. 계림유사에서는 「수」로 훈몽자회는「쉬」로 훈하였다. 신라시대의 지명「수천」(藪川)을「화천」으로 역(譯)한 것을 보아도 「화」는「수」로 통의(通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수는 「임수」(林藪)「수림」(樹林)의 의(義)로서「숲→수�P」으로 훈하였다. 수�P골>숲골의 훈이었떤 수곡(藪谷)을 훈이 비슷한 「화곡」으로 전사시켜 오래 사용해오던중 오늘날의 음독(音讀)으로 전음되어 화곡(禾谷)이라 부르고 있다. 원래의 훈명「쉬곡」이 한자의 음표를 쫓아 화곡(禾谷)으로 전환되었다. 三) 터굴의 지성개요(地性槪要) 1) 지질(地質) 지질은 선켐브리아기의 월산견통(月山見統)과 이를 관입한 덕정리(德井里) 편마암 및 중생대 백악기(白堊記)에 이를 재차 관입한 흑운모편마암류(黑雲母片麻岩類)와 사니석편암(絲泥石片岩)이 주로 부존되어 있다. 2) 지표(地表) 상당히 저이(低裏)한 구릉성(丘陵性) 노년기 지형으로 충적평야(沖積平野)가 차지하는 면적이 대부분임으로 주요물질은 자갈 모래 및 점토(粘土)이다. 3) 지형(地形) 지형의 경사가 대단히 완만하여 전체면적의 90%가 5~15%의 완경사(緩傾斜)를 보여주고 있다. 4) 토양성분(土壤成分) 토양의 대부분의 ML·CL등의 세립질(細粒質)토양이고 모물질(母物質)은 완전히 풍화(風化)된 상태이다. 점토의 응집력은 0.04~0.35㎏/㎝ 5) 토양의 비중(比重) 토양의 비중은 2.45~2.78의 넓은 범위를 보여주고 있으며 액성한계(液性限界)는 대부분 30~50% 중간값을 갖고 있다. 新德里(신덕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 5년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신리, 하신리, 명곡동, 수곡동, 소덕동과 웅천동, 덕두리, 언내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신과 덕두의 이름을 따서 신덕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신덕리로 되었다. 곰 내 (熊川) 신죽리와 신덕리 사이의 내 우리나라의 해안지방의 취락지명에는 "ㄱ·ㅁ"계(系)의 지명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 "ㄱ·ㅁ"이 한자로 표시되는 것에는 금(金), 감(甘), 금(錦), 금(今)이 있고 다시 뜻이 "ㄱ·ㅁ"음으로 나는 구멍혈자(穴), 곰웅자(熊)등이 있다. 이름난 땅에 곰내(熊川)라는 지명이 많으며 고음내(古音川) 라는 음자(音字) 지명이 수다하다. 신덕리에 곰내가 있는바 수원이 길지 않으나 지형이 협소한데에 비하여 수량이 많아 이 고장 농사의 젖줄이 되고 있다. 천북에서는 제일 큰 내이다. 백제때의 금강 곰나루라든가 보령땅 웅천의 곰내 천북땅의 곰내는 그 지방에서 제일 큰 강이나 내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고래로부터 신(神)의 의(義)를 표기하는 데에는 " ">"곰" 또는 "고마"로서 신성(神聖)한 것 매우 큰 것을 의미해왔다. 곰내(熊川)는 천북지방에서 제일 큰 내라는 뜻이다. 덕 머 리 (德頭里) 신덕리(新德里)에서 으뜸가는 마을 一) 덕머리의 이명(異名) 이 부락(部落)의 이명(異名)이 여러 가지다. 덕두(德頭), 덕두리(德頭里), 덕머리, 덩머리, 원덕(元德), 소덕(小德)등 여러 가지로 불려지고 있다. 二) 「덩」의 의미 유추(類推)되는 어원(語源)의 어형(語形)은「덩」이다. 여러 음형(音形)을 파생시킨「덩」의 뜻을 구명(究明)하면 다음과 같다. 「덩」의 의미는 공주(公主)나 옹(翁)주가 타는 승교(乘轎)이다. 덩머리의 지명(地名)에 덩자를 붙임 이유는 다음과 같다. 「덩머리」의 뒷산이 멍덕을 씌운 모양같기 때문이다. 멍덕은 재래종의 벌통위를 덮은 뚜껑인데 짚으로 바가지 비슷하게 틀어 만들어져 있다. 벌이 가장 좋은 꿀을 이안에 박아두어 여왕벌의 먹이에 제공된다. 三) 「덩」의 소이연(所以然) 멍덕 씌운 모습과 공주님이 타고가는 가마의 덩과는 물형(物形)이 같기 때문에 「멍덕」이라는 것보다는 「덩」이라 호칭(呼稱)하고 있다. 이곳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서는 몽덕두엄형이라 한다. 꿀향기를 멍덕의 머리속에 갈마둔 곳이란 뜻이 된다. 덕머리 주위에는 화봉(花峰)이 있고 꽃뫼봉이 있고 군봉굴(群峰谷)이 있다. 또한 죽림동(竹林洞) 죽현(竹峴)이 있고 봉두산(鳳頭山)에 개살이 그리고 수곡(水谷)>獸谷村(馬村)이 있다. 이곳은 지명상(地名上) 풍부한 밀원지가 되며 벌의 역사(役事)가 잘 이루어지지만치 꿀의 저장처는 멍덕>덩의 머리속이 될 수밖에 없다. 소초(巢礎)의 덩어리 재래종(在來種)의 벌통에는 꿀이 가득하고 로얄젤리는 멍덕속에 간직되어 있다. 멍석두엄이 아니라 멍덕속의 두엄(頭掩)으로서 머리속에 간직된 꿀향기가 은은히 봉두산까지 맛내음을 북돋운다. 四) 덩머리의 어형(語形) 멍덕의 머리를 멍덕과 유사한 "덩"의 머리로 대응시켜 사용했다. 「덩」의 취음(取音)은 덕응(德應)으로서 조선중기(朝鮮中期)까지 유지해오다가 그후 덕응이 덩으로 축약(縮約)하여 어형변화(語形 變化)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덕두(德頭)는 덕머리가 되는데 덕머리는 자음접변의 비음화(鼻音化)로 덩머리가 된 것이다. 등 건 말 (掛燈村) 덩머리 부락의 동남쪽에 있다. 덕두의 아름다운 산세를 돋보이게 하는 지기가 감돌아 여기에 촛대를 놓으니 온 동리가 밝다 말하여 등건 말이라 한다. 추야괘등형(秋夜掛燈形)이 있기 때문에 등촉(燈燭)을 밝히는 등잔걸이가 동명이 된 것이다. 등잔(燈盞)에서 잔이 탈락되고 걸이에서 걸이의 "ㄹ"과"이"가 탈락하여 등을 건 마을로 된 것이다. 다시 축약(縮約)되서 등건마을이 "등건말"로 어형변화(語形變化)가 된 것이다. 언 내 동 (원안>堰內) 소덕(小德)남쪽의 들안에 있는 마을인데 일명 개살이라고도 한다. 이 동네는 행주형(行舟形)이라 간사지를 막고나서부터 형세가 약해졌다 한다. 원뚝을 막을 때 양반의 회추리 한다발로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고목나무에는 착취한 쇠꼬뚜레가 많이 걸렸었다는 소문도 전해지고 있다. 죽 무 덤 (죽림동<竹林洞> 또는 도덕재) 곰내고개를 넘어서면 길가 북쪽으로 동네가 있다. 여기를 도덕재 또는 죽무덤이라한다. 이곳 서남쪽 500m이내에 봉두산이 있다. 봉두산 아래 동네를 개살이 동네라 하고 길옆에 각시바위가 있다. 봉두산(鳳頭山)은 봉 머리같은 형상을 하고 동북(東北)쪽을 향하고 있다. 봉황새는 원래가 대나무 열매(竹實)가 있는 곳을 따라 다니며 앉기 마련이다. 봉두산이 있고 대무덤이 있음은 당연한 형국(形局)이다. 대무덤이란 죽림(竹林)을 가리킨다. 대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숲 즉 총림(叢林)인 것이다. 이 지방사람들은 중무덤을 중이 죽은 무덤인줄 여기고 있다. 현재 죽무덤(대무덤)이 있는 곳은 도덕재 넘어 있고 또한 개살이 동네에도 있어 봉황새가 마치 대숲에 앉아 있는 형국이다. 전설에 의하면 한국사신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의 명사(名師)와 한국의 퉁수를 논하던 중 덕두(德頭)명당에 언급되자 덕두리 근방에 봉두산이 있어야 되는데 하며 문의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덕두리에 있지않고 이웃 마을에 있다고 하니 10리안에 있으면 우호하다 하면서 자격이 구비되려면 죽림(竹林)이라는 지명이 있어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그 후 한국에 와서 이 지방을 답사하다가 봉두산하에 죽림동이 있는 것을 보고 중국지사의 지리적 통찰력에 재삼 통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新竹里(신죽리) 본래 홍주군의 지역인데 고종광무5년에 오천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천파동, 구봉동, 죽현리, 농양리, 신촌과 옹천동, 언내동의 각 일부와 결성군 가산면의 죽현리, 농현리, 염리, 신리, 마촌을 병합하여 신촌과 죽현의 이름을 따서 신죽리라 하여 보령군 천북면에 편입됨. 특히 川北面(천북면) 新竹里(신죽리) 新德里(신덕리) 一帶(일대)에서는 早期達成裁培技術(조기달성재배기술)이 道內(도내)는 勿論(물론) 全國的(전국적)으로 發達(발달)되는 嚆矢(효시)를 이루고 있다. `95.1월 1일 법률 제4774호로 대천시와 보령군 통합, 보령시 천북면 신죽리로 되었다. 군 봉 굴 (群蜂谷) 숫골>숫굴(水谷) 남쪽 신죽리에 있다. 신죽리에서 곰내를 향해 서쪽으로 가는 자동차길 북쪽에 꿀뫼봉(蜜花峰)이 있다. 이 꿀뫼봉 아래 동네를 군봉굴이라 군봉굴이라 함은 그 동네가 군봉작대(群峰作臺)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꿀뫼봉을 중심해서 인근의 산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북쪽 숫골 뒷산이 화봉(꽃봉>花峰)이라 해서 옥녀직금형이 있어 그 근방 지명에는 배짜는 것에 관계되는 지명이 여러개있다. 서쪽에는 중국에까지 알려진 덕두리(덩머리)명당이 있는 곳이다. 동쪽에는 만궁사작형(滿弓射雀形)을 하고있는 장자울이 있다. 이곳이 바로 꿀뫼봉이며 바로 군봉작대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봄날 복숭아 꽃이 푸르익은 꿀뫼봉에는 통봉벌의 역사가 한참이다. 군봉굴이란 바로 군봉(群蜂)이 소초에 꿀을 잠겨두기 위하여 역사한다는데서 기인된 것이다. 꽃봉을 찾아 밀원지를 꿀을 저장하는 그 모습이 가히 흥하는 동네를 상징한다. 그래서 신죽리 일대에 근면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셈이다. 농현의 농기(農峴의 農旗) 신죽리에 삼현이 있다. 이름하여 죽현(竹峴), 농현(農峴), 신현(新峴)이라한다. 그중 가장 오랜 지명이 농현이다. 옛날부터 협업(協業)하는 농사로 전통이 깊다. 그 산 증거로는 농번기때 두레가 나면 여러 동리에서 농기를 들고와서 농현의 농기에 인사의 절을 하고는 각 마을의 두레에 들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큰 느티나무가 부락의 중앙지에 위치해 있다. 이 나무는 옛날부터 당(唐)의 나무로 위했다. 양식이 딴곳의 목신제와는 아주 양상이 다른데 의의가 있다. 매년 정월보름을 전후하여 호당 각자가 아주 은밀하게 자기집의 무사태평과 동네농사의 대풍을 기복해 오는 미풍양속의 전통이 있다. 지금도 이 부락은 인심이 후하고 언제나 농작물의 풍요를 가져오는 모범된 부락이다. 당 고 지 (당구지) 낙동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당고지 산록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천북의 진산이 되는 당산이 있다. 옛날에는 주민의 수호와 해산물의 다수확을 비는 당제가 있었다. 당고지는 곶이가 높고 길기 때문에 마가 성할 시절에 말을 조련하였던 곳으로 이름이 나있다. 또한 당고지 서쪽은 천북면의 최초의 면소재지였다. 대 고 개 (竹峴), 수곡의 동남쪽 은하면을 지나 천북면에 들어서면 대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이 대고개는 봉두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천북면 입구에 있는 고개이다. 대고개라는 지명이 등장되는데는 이유가 있다. 천북지형을 활짝 피어놓은 부채꼴 모양이라 하면 이 지방은 부채의 손잡이에 해당된다. 이 지방의 아름다운 산세를 보여주기 위하여 조물주는 여기에다 화봉, 꿀뫼봉, 덩머리, 봉두산, 연달뫼(連峰) <장척리 : 이웃산> 등을 두었다. 산이 좋은 곳이라 물도 맑아 수맥이 잘 돌기 때문에 복거(卜居)할만 하다해서 청기(淸基)가 있고 사람이 장수한다는 수곡(壽谷) 일명 숫골(水谷)이 있고해서 일종의 무릉도원을 연상케한다. 인근에 개가 있고 개를 먹이는 각시바위가 있꼬 논을 가는 농부가 있는 곳에 군봉굴이라해서 꿀을 역사해오는 벌들이 군무하니 가히 평화촌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평화를 상징하는 봉황새가 앉아 있고 주위에 대나무밭이 있어 봉명재수(鳳鳴在樹)의 이상향이다. 이곳 대고개는 천북의 평화촌에 들어가는 상서로운 지경(地境)의 표시로서 생긴 지명이다. 마 촌 (馬村) <신죽리> 교통이 편리한 섬 담을 쌓지않고도 관리하기가 용이한 지역을 선정하여 말의 방목지로 택해 온 것은 사적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특히 역마, 역용, 군마의 증발 목적으로 제주외에 각지의 목마장을 만들게 했다. 함남의 마양도, 진도 남무관, 남해군의 마도등을 들 수 있다. 육지로서는 천북같은데가 방목지로 알려져 있다. 천북면은 오천해협과 성호해협으로 둘려쌓여 있어 광천에서 들어오는 낙동의 좁은 목을 막기만하면 천연의 방목에 가합하다. 뿐만아니라 구릉지대이고 목초가 잘 자라기 때문에 더욱 적합하다. 현재는 젖소를 기르는 목장이 눈에 뛰게 늘고있어 목축지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촌을 말마지로서 옛날 제주도에서 말을 실어 왔을 때 배에서 말을 출어내린 곳이다. 말이 없었던 이곳에 말을 처음으로 들여왔기 때문에 말을 맞이한 곳이라하니 천북 방목지의 여명이 여기에서 열린 것이다. 그리하여 주로 말을 이곳 마촌에서 먹이고 말의 훈련장으로는 낙동리의 진당산을 이용했다. 진당산은 능선이 길고 펑퍼짐하여 말의 조련장으로 오랜 세월을 보내왔기에 지금도 군데군데 그 유혼을 볼 수 있다. 말이 병들면 화곡마을 동쪽의 말마당 굴에다 격리했다. 말의 마소는 숨은개에서 많이 마련했다. 그 장소는 건초장으로 이름이 나있다. 말의 외지훈련장으로는 은하면 장척리 일대였다. 장척리에 예로부터 장수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활을 많이 쏜 곳이라 한다. 그리고 쉴참에는 장척2구 중리에서 죽을 먹였다는 전설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보령군에 마(馬)와 관계되는 지명으로는 주포면의 관말(관촌,역말,역촌)이 있고 청연역에서 말우는 소리가 늘 났다는 마명(마장리)이 있다. 삼 산 (삼산의 유래) 한산 이씨들이 천북땅에 들어온지는 오래이다. 지금으로부터 350여년전 이태중(李台重)씨가 이곳 신중리 농현에서 사셨다. 벼슬은 호조판서를 지내셨고 하향한 뒤는 권학권농에 힘쓰셨다. 옛날 바닷물이 농현앞까지 들어왔을 때 그날에는 아담하고 자그마한 섬같은 산이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화조월석 들물 썰물에 산이 섬이 되고 섬이 산이되는 목전의 세상에 정이 끌리어 호(號)를 삼산(三山)이라 했다. 그후 이곳을 삼산 어른이 사신 곳이라 하여 삼산이라 호명하게 되었다. 오늘날 삼산이 되기까지는 삼산이란 산과 삼산이란 호가 서로 섞바귀에 수백년 내려오는 동안 명실상부한 이름으로 녹은 것이다. 수 골 (壽谷 - 水谷) 수골(수곡)은 신죽리 대고개 북쪽마을이다. 청기(淸基)와 덕머리와의 산줄기 사이에 있어 수원이 좋다. 수원이 좋고 물이 깨끗해서 인지 예로부터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뒷산에는 화봉(花峰)이 있고 앞산에는 꽃뫼봉이 있어 화락한 기운이 감돌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금도 천북면내의 최고령자가 2명이나 생존해 계시다. 이 골을 한자로 수곡(壽谷) 또는 수곡(水谷)이라 통용하고 있다. 수곡(水谷)을「수굴」이라 하는바「스」는 수(水)의 음차(音借)가 되고 「굴」은「오:우」의 모음교체(母音交替)로 意味를 분화(分化)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동양사상(東洋思想)에 의한 풀이를 부기(附記)하면 아래와 같다. 수굴(水谷)은 목국(木局)이라 수(水)에서 포태(胞胎)하므로 수(水)의 기운을 받아 사람이 수(壽)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수(水)는 체(體)가 되고 수(壽)는 용(用)이 되어 수(水)와 수(壽)는 항상 상보적인 입장으로 이 지방 지형(地形)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새 터 (新村) <신죽리> 대고개 남쪽에 새로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을 새터라 부른다. 한자명으로는 신촌(新村)이라 한다. 이곳은 은하면(銀河面)과 접경지대이다. 원래는 용천면의 신촌이었는데 천북면이 생기면서 은하면에서 이관되 온 곳이다. 청 기 (淸基) 대고개 북쪽으로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청기(淸基) 또는 청계(淸溪)라고도 한다. 산마루의 양기슭을 청계(청계)가 하르고 있다. 이곳을 청계산이라고도 하고 하록(下鹿)의 줄기 봉을연달뫼(連奉)라고도 하여 천북면과 은하면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